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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미국에서 유산, 계류유산 - 소파술 (D&C) 하기 전 이야기

유하루맘옥또니 2023. 7. 1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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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의 시작인 1월을 유산의 아픔으로 시작했고, 4월에는 화학적 유산을 한 번 경험했다. 화학적 유산은 보통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한 번 유산의 아픔을 겪고 다시 임신을 시도하다 보니 집에 쌓여있는 애물단지 같은 임신테스터기 때문에 굳이 알고 지나간 나였다.

7월에 다시 한번 했던 임신도 거의 집착 수준으로 테스터기를 사용했다. 4월 유산 때는 테스터기가 짙어지다가 다시 흐려져가지고 유산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흐려지진 않을까 너무 무서워 검사를 계속했고, 다행히 테스터기는 계속 진해졌으며  대충 6주 차까지 기다렸다가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진행했다. 유산을 경험하고 난 후라 6주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열흘 같았다.



미국에 사는 엄마들이면 공감하겠지만 미국의 시스템은 정말로 거지 같아서 한국은 임신 5주 차에 병원 가면 아기집을 확인하고 8주 차에 가면 초음파로 아기랑 심장소리도 들려준다는데 여기는 8주 차 전에 가면 아무것도 안 해주고 소변검사만 해준다. 이번에 6주 차에 피검사를 할 수 있었던 건 지난 유산경험을 이야기했고 불안하니까 피검사 수치라도 알고 싶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바로 산부인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단 주치의를 만나고 임신 확진을 받으면 OBGYN닥터를 연결해 주기 때문에 산부인과 닥터가 주치의가 아닌 이상은 닥터 연결까지 최소 2-3주가 더 걸리고 (누가 OBGYN닥터를 평소 주치의로 두겠는가…….) 한국이었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유산도 다 일어나고 난 후에 알 수 있다.

나는 한국병원을 주치의로 지정해 놨기 때문에 일단 샌디에이고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피검사를 했고, 검사 후 3일 후에 전화를 받았다. “축하드려요~ 피검사 결과 임신 맞으세요~”라는 아주 밝은 간호사분의 전화를 받고 펑펑 울었다.

그래도 사실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임신 확진을 받았지만 대략 6주 정도였고 아직 유산이 또 일어날 수 있는 임신 극초기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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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GYN 진료 예약을 잡았다.

대략 9주 정도 될 쯤에 예약이 잡혔고, 9주까지 기다리는 게 불안한 나머지 초음파를 봐주는 사설기관인 Mommy and Me라는 곳에 대략 8주 차쯤 될 시기에 예약을 잡고 남편과 초음파를 보러 갔다. (사설 기관이기 때문에 보험 커버는 되지 않는다).

Mommy and Me를 걸어 들어가는 입구에는 예쁜 아이들 사진과 입체초음파까지 걸려있었다. 나는 병원에서는 봐주지 않는 입체 초음파도 볼 수 있구나! 하며 설렜었고 그 설렘은 일반 초음파를 본 후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8주 정도 된 크기가 아니라서 정확한 초음파를 볼 수 없었고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하려면 조금 더 커서 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생리 주기가 43일 정도이다. 그래서 첫째인 하루도 예정일이 처음엔 7월 24일 즘이었다가 8월 1일로 바뀌었었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날은 눈물을 꾹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하루가 열흘 같은 일주일을 기다렸다.

드디어 OBGYN 닥터를 만났다.

일주일이 지났으니 아이는 최소 8주 차는 되어있을 거라 기대하며 의사를 만났고, 초음파를 본 의사는 내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재차 물어보며 아이가 아직 6주 정도 크기이기 때문에 아직 크기가 작을 수 도 있다며 일주일 후에 다시 아이 크기를 보자고 했다.

그리고 Lab에 가서 피 수치를 이틀 간격으로 총 세 번 검사하라고 오더를 내렸다. (정상 임신을 하면 피검사 수치가 48시간 내에 일정하게 증가해야 하는데 그 수치를 측정하기 위해서 Lab order를 내려줌).

피 뽑는 데는 잠깐이지만 이번에도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역시나 다시 닥터를 만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지났고, 나는 다시 의사를 만났으며 초음파로 여전히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이와 더불어 더블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정확히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첫 피검사 수치가 11,000근 방이었고 두 번째 피검사는 12,000 중반대,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수치가 11,000대로 떨어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OBGYN닥터를 만났을 때 한국처럼 유산방지 약을 처방해 준다거나 안정을 취하고 일을 좀 쉬었으면 괜찮았을 수치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침울해져 있는 나와 남편. 그냥 말없이 있는 우리를 보며 닥터는 아직 희망이 있을 수 도 있으니 일주일 후에 다시 확인해 보지 않겠냐는 희망고문 같은 소리를 했고 계속된 기다림에 지친 나는 당장 수술 날짜를 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주 토요일에 수술이 잡혔다.






내게 너무 끔찍했던 21년. 나를 버티게 해준 내 딸 하루.